나약한 내가 싫어요.

아침에 Exterminator가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12시가 지나도 안 오길래 슬슬 센트럴 파크 야외공연에나 나가볼까 하고 샤워했어요. (응, 샤워하는 도중에 현관벨이 울리는 걸 듣고, 아 제길... 아침이래매 왜 이제서야 와 하면서 갑작스러운 스트레스성 두통을 느꼈죠...;) 혹시 아직 건물 안에 있으려나 하고 관리인한테 물어보려 나갔다가 다른 한국인 tenants를 만났어요. 집에 문제가 있어서 나가려고 하는데 집주인이랑 연락이 안되어서 왔대요. 무슨 문제냐니까... 오 마이 갓. bedbugs, '빈대'래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의 그 빈대예요.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실물은 못 봤지만;)
어째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얼마 전에 모기 물린 건 줄 알고 넘어갔던 게 빈대한테 물린 것 같아서 갑자기 불행의 나락이...;;; 건물 안에 퍼지고 있는 거라며 지금은 서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주는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심각하고 끔찍해서... (점점 더 번지고 절대 안 없어지니까 당장 이사하고, 가구는 싹 버리고, 옷도 버리거나 삶아서 소독 밀봉해야 하고, 책도 탈탈 털어서 잘 확인해야 한다는 게 결론. 에엑- 하니까 아직 당신이 고생을 덜해봐서 아까운 생각이 드는 거라며 달관한 미소를 짓는데...;;;) 하아... 어떻게 해야 할지... 즐! 즐! 즐!
그러고 보니 올해 초인가 뉴스에서 뉴욕에 빈대 나왔다고 막 떠들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이... 정말이지 드러워 죽겠...; 바퀴만으로도 충분히 정신공격인데... 어째 이리 살기 안 좋고 구질구질하게 불편한 부분들만 이래저래 크게 느껴지는지 ^^; (수준높은 공연과 문화시설은 좋아서 왜 진작 안 왔을꼬- 싶었는데, 생활 면에서 시달리는 게 진짜 많아서-정신적으로 퀭~;- 내가 미국 싫어했던 게 역시 타당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막 듬;)

여기 와서 지금껏 편지 쓴 게 부모님한테, 그것도 딱 한 번뿐이예요. (안부 전화는 종종 하지만.)
쓰려고 몇 주 동안 갖고 다니다가 봉투만 닳은 걸 보면서, 대체 왜 이렇게 못 쓰고 있는 건가? 자문했어요.
그래서 왜 이럴까- 뭘 걱정하는 걸까- 문장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니까,
아마 내 안의 불확실한 부분들을 확신으로 바꾸어서 즐겁고 좋은 일들과 엮어 얘기해 주고 싶은데,
아직 현재진행형인 내 안의 불안한 감정들과 마주봐야 하기 때문에 자꾸 회피했던 것 같아요.

자괴감, 자만심,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나태, 어느 것도 좋지 않은 걸 알지만 결국 모두 갖고 있어요. 바보같아! 그래 바보다! 쳇... 어째, 살아있으니 살아봐야지. 그걸 조절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니까 자신의 가장 큰 적도 자기 자신이고, 마찬가지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것도 자신이라는 거겠죠. (낙천론자가 비관론자보다 행복하게 잘 사는 이유... * *)

때로는 잘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어느 정도의 자신감도 있지만,
때로는 이러고 있는 걸로 괜찮은 걸까 뭘 어떻게 더해야 하나 나한테 가치가 있긴 한가 너무나 불안해지고,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어찌 이리 개인적인 것에만 머무르나 싶어져 주변에 미안하기도 하고,
빨리 이상적으로 가슴펴고 펑펑 나눠주는 위치에 있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괴감도 들고 외롭고.
결혼이나 아이에 대한 것도 나이와 연관지어져 슬슬 나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단 말이다 싶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건 상대가...;; 현실에서 사랑하네 어쩌네 하는 소리 들으면 짜증밖에 안 날 것 같아서 또 문제 ^^;
-이게 '사랑'이야? 누구의 무엇에 대한? 남발되는 사랑이라는 단어 사용의 착각과 혼동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우선시해서 중요하게 여기면서 무슨 남을 사랑한다고 떠드는 걸까. 뭐 그런 생각만 들거든요;
여자의 희생적 헌신 뭐 이딴 건 아주 진절머리나게 짜증나고 허무한 얘기로밖에 안 느껴지고.-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아예 초탈하고 무시해 버리기엔 만화와 소설에 두근두근하는 내 안의 부분이 좀 크고...
-> 열렬하게 사랑해서 행복하게 맺어지고 알콩달콩~ 하는 얘기 보는 걸 또 좀 좋아하거든요;; 언해피 싫어.)
그런저런 걸 생각하다 보면 어쩐지 슬플 따름이고 내가 좀 외롭구나- 싶어지고.
(천둥번개 치는 것도, 무섭다기보다는... 어쩐지 의지할 게 있었음 좋겠어- 자꾸 자각하게 만들어서 허탈.)

나이가 찼으면 가정을 꾸려야지, 애도 아닌데 현실과 허구를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가 세상에는 깔리고도 넘쳤죠. 그러니까 나도 대외적 멘트는 무난하게 다른 말로 넘기지만, 뭐 사람마다 사는 법이 다르기 마련인데 무책임하게 감놔라 배놔라 하며 오지랖 넓은 참견을 친절로 착각하는 쪽이 진짜 문제 아닌가요. 뭐 사적인 질문에 대한 무례를 무감각하게 저지르며 나이가 몇이면 이렇게 살아야지 류의 표준화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도 한국뿐인 것 같지만. 흐응, 현실, 말이죠. 성희롱이 버젓이 면책되는 직장이나 밤길 다니기 두려운 사회, 혼수로 열쇠 몇 개쯤은 기본이고, 재테크와 맞벌이는 당근이고, 나이도 있는데 애도 빨리 가져야지 애는 또 애대로 25시간 잘 돌보아 키우고 공부시켜야 하고 남편 뒷바라지도 잘하고 시댁 어른들도 찰떡같이 잘 모시고, 근검절약해서 좀 살만해지면 바람피울 수도 있긴 한데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사내의 생리니까(우엑) 또 다소곳이 잘 다독여 가정을 지키고 어쩌고 하는 걸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싶다면 남을 뜯어말릴 생각은 없지만(그나저나 읊다보니 진짜 무슨 수퍼우먼 신드롬 같은...;), 굳이 현실로 만드는 늪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지도 않아요.
난 그런 거에 쫓기는 걸 자신의 현실로 만들고 싶지 않다구요. 이 무슨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인생이람! 쿠에에엑.
(뭐 꼭 일반적인 현실론을 따르고 싶다는 사람한텐 사랑과 전쟁, 치터스 같은 프로그램을 추천해 주고 싶... -_-;)

낑낑거리고 싶지 않아요. 산뜻하게 휘리릭 하고 좋은 부분들을 보며 힘차게 살고 싶다구요.
남한테 의지하면 안 돼요. 혼자서 잘 서야 해요. 잘 서고... 주변도 튼튼하게 좀 받쳐주고 싶고...
우는 소리는 필요없어요. 무의미하니까. 다만 나는 지금 뭔가에 좀 질려있어요.
그래서... 주절주절 털어버리고 싶었어요. 이래저래 조언을 얻고 싶을 때가 많은데, 물어볼 사람은 딱히 없어요.
(평소에는 '괜찮아, 내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 봐야지 뭐.' 하지만...
때로는 음... 이런 소리 하면 못난 거 알아요... 하아 ㅠ ㅠ)

추신 : 서울 물가가 세계 2위로 올라섰대요. 뉴욕, 도쿄, 이젠 서울...? 아주 물가 비싼 도시만 골라사는 듯한...;

경과중간보고 : 311에 연락해서 시에서 조사나오게 하자 small court로 가자 그냥 다 포기하고 빨리 뛰쳐나가자 하는 다른 세입자들 얘길 들으며 심란해하다, 다음날 다른 미국인에게 상담했더니 대뜸 "우리 집에도 빈대 있어. 쥐도 나오는걸?" 하는 반응을... 뉴욕에서 아주 흔한 문제를 겪고 있는 거라고,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웰컴 투 뉴욕! ^_^" (대략 매트릭스의 리얼월드 삘 나게;) 같이 웃음을 터뜨리고... 귀가길엔 Fog형 강력살충제를 사왔어요. 내일 푸슉~할 거예욥. (이거 신경 쓰다가 쌀을 못 샀잖아! 투덜~ ^^;) 집주인이 관리회사에 연락해서 방역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언제가 될지 알 수 없고 아무튼 인내심을 가져달라니, 우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놓으려구요. (빈대에 대한 공포스러운 얘기들을 듣고 너무 속상해서 동넬 뛰쳐나가든가 완전히 해결해 주기 전엔 집세 withhold할 거얏 하고 수표 정지신청까지 잽싸게 해놨는데 ^^; 막상 집주인 얼굴 보니 또 나쁜 사람 같지가 않아서 마음이 약해졌...;;;) 뭐 비교적 일찌감치 문제를 알고 대처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lucky라고 생각해요. ^^ (피해가 경미한 수준일 때 빨리 이사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계약해지할 정도의 사유는 안 된다 하고... 어디가 안전하다는 보장 자체가 없는데 피같은 돈과 신용 날리기도 좀... 아 다시 머리가 아프...;;)